'통제'와 '감시'에 대한 단상

I ♡ sophia! 2009.01.12 18:36 posted by 차완무시


미네르바의 구속 사태를 지켜보면서, 덜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경제 살리기라는 명목 하에 감시와 통제를 일상화 하고 정당화 하겠다는, 이 '돈벌이'에 미쳐버린 사회. 검찰은 한 술 더 떠 미네르바의 글이 국가에 2조 얼마 얼마의 손해를 끼쳤다는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했다지요?
경제를 위한다며, (뻔뻔하게도) 다수 노동자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더더더 미친 듯 일하라고 외치던 권력자들이 이제는 한 술 더 떠, '생각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일만해! 그건 우리가 할 거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기민하게 행동에 돌입했어요.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던 한 네티즌이 구속돼 버렸습니다. 떨썩.

저든 '통제'와 '감시'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념 자체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통제와 감시를 누가 누구에게 행사하느냐 따라 달라지는 감정입니다. 권력이 권력을 가지지 않은 이를 향해 통제와 감시를 날리면 분노합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지지 않은 이가 권력을 향해 통제와 감시를 날리면 환호합니다.
주목할 것은 첫 번째 입니다. 두 번째는 제 맘에 쏙 들거든요.



감시와 통제는 누가?

감시와 통제라는 표현을 접하면 우선 우리는 '전체주의 사회'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도 감시와 통제는 존재합니다. 어떤 사회라도 존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소수의 권력자로부터 발사 되어 다수의 대중을 향하던, 그 반대의 경우가 되던 말입니다.

예로부터 감시와 통제의 권한은 보통 사람들을 뛰어 넘는 초 슈퍼 울트라 한 존재에게 부여되는 권력이었습니다. 소유했던 사람나 집단의 면면을 보면 확 드러나지요. 전지전능한 신과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 그리고 왕과 제후들.
근대에 들어와서는 소위 '이성적 질서'가 사회를 지배하면서 '합리적 초 슈퍼 울트라한 권력자'에게 그 힘이 넘어갑니다. '합리적 권력자'는 선거에 의해서 선출 됩니다.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권력이지요.
그러나 개개인의 권한을 위임받은 '합리적 권력자'라고 해서 대중들을 향한 감시와 통제의 시선을 줄이거나 없애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가 행하는 감시와 통제가 '합리적'이지만도 않구요. 오히려 감시와 통제의 매커니즘은 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복잡함에 비례해서 더 공고해졌지요.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권력자'에 의해서 감시당하고 통제당합니다.
마침, 우리는 무척 딱이다 싶은 예를 직접 경험하고 있잖습니까? 이MB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 이MB의 폭정을 그대로 감내하고 있는... 느낌표 일곱 개!!!!!!!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하고 이MB에게 반하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하면 잡아가요 ㅠ_ㅠ) 감시와 통제가 극에 달한 사회!
슬프게도 우리는, 그러한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지위를 '선거를 통해' 이MB에게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우리가 권력을 부여한 권력자가 휘두르는 권력이니 체념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할까요?
..........................................................................................................그럼, 너무 슬프잖아요.


소위 우리가 '이성적이다' '합리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의 한계는 드러났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합리적' 선택으로 인해 이MB정권이 탄생했는데, 이 MB정권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합리적'으로 선택을 한 것일까요? 아니, 과연 '합리'라는 것이 있긴 한 것일까요?



감시와 통제를 왜?

왜 권력자들은 감시와 통제를 할까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권력을 유지하지 위해서 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혁명을 막기 위해서지요.
왜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자들은 권력자를 감시하고 통제 할까요?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권력이 폭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독재를 막기 위해서지요.

주목할 것은 첫 번째 입니다. (후자는 제 맘에 든다고 이미 말했으니까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를 만들어 내면 안 됩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대중은 잠재적인 반역자들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늘 대중의 삶을 지켜보고 대중의 행동을 통제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감시의 빈틈을 찾지요. 우리의 삶 속에서는 숨고 찾는 숨바꼭질이 반복 됩니다.



사람들은 왜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려 할까?

왜 꼭 숨으려 할까요? 왜 감시를 벗어나려 할까요? 왜 혁명하려 할까요?
대답하려니, 피식 웃음이 납니다. 초딩도 알만한 간단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답은, '하고 싶으니까' 입니다. 욕망 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더 행복한 세상을, 더 즐거운 삶을, 더 자유로운 분위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든 밑바닥에는 이런 꿈틀거리는 욕망이 흐르고 있습니다.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 더 욕망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좀 고리타분한 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다른 답을 찾아보려고 눈은 늘 크게 뜨고 다니기는 하는데 아직 못 찾았습니다.
제 답은 이렇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그들과 삶의 공동체를 이루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논리와 행동을 더욱 다양하고 넓게 하고, 그 힘으로 감시와 통제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 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힘 가진 사람이 하라는 데로 하지만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지요.

쉬워 보이지만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대통령과 장관과 국회의원과 경찰과 검찰과 사장님과 상사는 어쩜 그렇게 제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만 쏙쏙 골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명령하는지! 그들이 하라는거 안하면, 감옥가거나 월금을 못받게 되니,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용기가 필요해요.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룬 공동체에 대해선, 그 존재를 없애지 못해 안달을 냅니다. 막 범죄집단으로 매도하고 그래요.
그래도 권력자의 눈 앞에 발가벗겨져서 허우적 거리는 꼴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고 싶어요.
범죄를 욕망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저런 눈치를 보고, 감옥갈지도 몰라 겁내하면서 살아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욕망하는 당신들을 믿기에 버티어 볼랍니다.



더해서.
'욕망은 무슨! 난 질서와 의무, 책임을 더 아름다운 가치로 여기고 있다구!'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관점에서 한마디.

'이MB가 그럴줄 몰랐다'라고 마치 뒤통수 크게 맞은 냥 발 빼면 안 됩니다. 그는 충분히 '이럴 것이다'라고 예측 가능한 행보를 일관되게 걸어왔습니다.
물론 이MB가 현대 한국 사회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지가 무슨 신의 대리인이라도 된 것 마냥, 절차도 합의도 논리도 없이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측면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순진한 눈을 하고 '어쩜, 어쩜 이럴 줄은 몰랐어' 라며 발만 동동 구르거나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미 권력자인데' 라고 체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뽑아 놓은 책임을 져야지요. 미친개에게 칼을 들려 줘서 지나가는 사람 여럿 다치게 했으면, 미친개에게 줬던 칼 다시 뺏고 몽둥이질을 해야죠. 그게 미친개에게 칼 준 자의 책임입니다.


 

[미술관 & 츄리닝 입은 여자]는 미적 감각이라곤 옷 중에 딱 '츄리닝' 정도인 제가, 미술 작품들을 보고 든 느낌을 남눈치 안보고 대담하게 끄적이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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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 - 1918) : 에로틱! 에로틱! 에로틱한 오스트리아의 화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라. 설사 그것이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1. 누드화에 대한 생각.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은 모방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모방하는 걸까요? 우리의 삶. 현실이겠지요.  그렇다면 현실 그대로의 모습과 상황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일까요?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닐것 같아요. 예술은 현실을 100% 재현 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 하고, 그럴꺼면 예술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지요. 현실이 곧 예술인 거니까요. (어라~ 근데 이말도 그럴 듯 하네요.) '모방'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술은 삶의 '재현 또는 재생산'이 아니라 일종의 '변형'입니다. 그림이나 음악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하니까요.

'변형'
대체 우리는 이 변형에서 무엇을 얻어 내길래 '예술'이라는 걸 하고, 감상하는 걸까요?
초초초 천재 아리스토텔레스 님은 '카타르시스:정화' 라고 합디다. (노인네, 참으로 명쾌합니다. )
전, 초초초 둔재라 '삐그덕'이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명하자면, 그러니깐, 어떤것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술이란 녀석이 '어머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라는 감탄사가 나오도록, 제 사고의 '허'를 찌르는 거죠.
전형적인 틀이 깨지고, 균열이 생기고, 새로운 틈(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삐그덕' 한 만큼,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고, 느낌의 정도가 짙고 깊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예술에서 우리가 얻는 것이고, 예술이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습죠.

누드화를 보면서도, 이러한 보편적인 예술에 대한 시각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심장 박동을 즉각적이게 상승시켜 안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게하는 누드화.  사실, 더욱 사실적인 재현, 현실모습 그래로를 원한다면, 약간 위험이 있긴 하지만, 동네 목욕탕을 훔쳐 보는 것이 '벗은몸'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입수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행동을 통해, 제가 얻고자 하는 '삐그덕'이 벌어질까 의문 스럽습니다. 뭐 어떤식으로든 약간은 분명 생길 겁니다. 하지만, 결코 '그럴듯'하지는 않은 종류의 것이겠죠. ㅎㅎ

여하튼 누드화를 통해 얻는 '삐그덕'은 사람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찬미이던 폄훼이던)이 일차적이겠지만, '벗은 몸'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다가 '관능'을 불러옵니다. 적나라하게 벗은 몸이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상상하며 흐흐흐... 우리는 음흉해 지죠. 그래서 우린 때론 누드화를 통해 '관능'을 일차적으로 얻기도 합니다.
 



2. 실레의 삶

실레는 28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은 생이지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 꺼리를 만들었지요.
그의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죽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매독은 매우 흔한 병이었다고 합니다.) 실레의 눈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실레는 그의 어머니를 내내 무척 미워했데요. 그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실레의 애정이 아버지에게만 향해 있었다는 건 무척 의아한 일이죠. 전 전혀 반대일꺼라고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그과 그의 여동생과의 관계가 참 독특합니다. 그의 여동생은 그를 위해 누드화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누드화 모델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고 해요. 제 생각엔 아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성인 여성인 어머니에게서 느낀 실망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요? 소녀이고 어린 동생에게서 순수함과 관능을 동시에 느낀 것이죠. 실레에겐 그녀의 동생이 그림의 대상이 되고, 애정의 대상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실레는, (예술가의 삶이 의례 그렇듯?) 허세를 즐겼던 사람 같아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져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예술가는 모름지기 가난하고 약해야 한다며, 안그런데도 그런척 하며 살았데요. ㅋㅋ 뿐만아니라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이상과 현실을 철저하게 구분할 만큼 영악한 것 같기도 합니다. (글쎄, 수년간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던 여인을 차버리고, 귀족(중산층) 여인과 결혼한데요... 쳇)

'키스'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후원했습니다. 둘은 이후에도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지요. 초반에 실레는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후에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창조합니다. 두리뭉실함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법으로! 말이예요.

요약하면 그는,
 '관능'에 대한 집착 과
 속물적 기질을 보유하고 있으며, 허세를 즐겨 부린다 는 것 . 흐흐흐



3. 그의 작품을 보며 난 이렇게 '삐그덕'했다!


1) 절박함 : 절박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


포옹, 1917, 캔버스에 유채, 100 x 170.2cm

포개지기 직전의 남녀, 미친듯이 절박하게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인물은 타오르는 욕망에 충실하게 서로의 몸을 안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욕망 속에 너희도 끼어들어 봐' 라고 유혹하는 것 같아요. 모델이 있었다면 그들은 정말 서로의 몸을 간절하게 원하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리얼함의 극치. 이건 화가가 시켜서 취할 수 있는 포즈가 아닌거 같아요. 흐드러진 머리카락 드러난 체모, 꿈틀거리는 근육과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흰 시트.
아...저도, 그를 안고 싶습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없던 욕망도 불끈 불끈 생기게 하는. 절박함의 힘!



2) 도발 :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저 눈빛, 내가 졌소!



헝크러진 머리, 오르가즘에서 막 헤어난 듯한 저 끈적끈적한 눈빛, 나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아... 떨려요.
동네에서 좀 놀면서 남자 여럿 울렸을 법한 자세와 눈빛,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앳된 '소녀' 입니다. 요부와 소녀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녀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관객 마음의 빗장을 두르립니다. 씩씩한 주먹질이 아닙니다. 발가락으로 살살살, 빙글빙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근두근' 합니다. 그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남정네가 있을까요? ㅋㅋ 

몰락한 제국, 거리의 화랑에 누드화가 넘쳐났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소녀의 등장은 그때도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야동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의 관객도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지 못할 꺼 같으니까요.

검은머리의 소녀,
1911,
종이에 연필과 수채화,
56.2 x 36.7cm





다리벌린채 누워있는 누드,
구아슈와 연필,
47 x 30 cm



적나라 합니다. 보란 듯이 체모와 음부를 드러냅니다.
두리뭉실 야릇한 뉘앙스만 풍기는게 아니라, 그냥 밀어붙여서 다 드러냅니다.
아름다운 바디라인? 그런건 없습니다.
'이래도? 이래도?'
저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의 몸도 이렇잖아!' '너도 욕망 덩어리잖아!' '점잖은척 따윈 집어치워!' '옷을 벗고 거울앞에 서서 눈 똑바로 뜨고 너의 모습을 봐!' '그것을 두려워하지마!'
너무 적나라해서 불편합니다. 적당히 감추고 꾸며줘야 쉽게쉽게 편하게편하게 볼텐데... 마치 숨기고 있던 나의 알몸이 만인 앞에서 공개 된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3) 신경질, 불안 :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래서, 반했다!



그는 수천점의 드로잉 수백개의 회화를 남겼어요. 자화상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의 자화상들을 보면서 그는 분명 자신의 불안과 신경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 기묘한 몸의 각도와 포즈 표정을 보세요. 편안함과는 수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지독한 자기연민.
자기 내면의 모습을 시각화 하기 위해 전전긍긍 끙끙거리며 애썼을 실레의 모습을 떠올리니, 아~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욕망에 충실한 삶'과 '위선적인 사회적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불안해 하는 실레, 그리고 그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세포들. 거친 연필질.



 

4. 허무하게도...... 28살, 감기 걸려 죽다.


실레는 전쟁터에서,
임신했던 그의 아내를 독감으로 저세상으로 보내고, 얼마후 그도 감기에 걸려 죽습니다. 28살에!

내 나이 보다 조금 살다 갔네요.
제길. 비교가 무의미 하다는걸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삶의 모습이 왠지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삶의 모습,( 아아 이렇게 일반화 하는건 비겁한 모습.) 아니, 제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위인전 읽듯, 그의 생몰년도를 건조하게 지나칠 수가 없군요.

조심해야 겠습니다. 전쟁터를 휘돌던 독감에 걸려버리면, 죽음을 다이렉트로 맞이해야 하잖아요.
2008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삶에서, 독감 따위, 저에겐 스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실레가 죽었을 때 유럽의 화단이 느낀 절망과 슬픔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삶을
다시한번 결심하다.


실레의 그림을 보면서 다시한번 다짐 합니다.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겠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어 울지 않고, 허황된 미래에 취해 허우적 거리지 않고, 현실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 가겠습니다. 욕망이 만들어내는 기형적인 형태를 낯설어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풍기는 관능을 즐기겠습니다. 무척,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 삶이, 그런 삶이 담긴 그의 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