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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 - 1918) : 에로틱! 에로틱! 에로틱한 오스트리아의 화가.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라. 설사 그것이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1. 누드화에 대한 생각.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술은 모방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방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인 것이라 했습니다.
무엇을 모방하는 걸까요? 우리의 삶. 현실이겠지요.  그렇다면 현실 그대로의 모습과 상황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일까요?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닐것 같아요. 예술은 현실을 100% 재현 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술적으로도 불가능 하고, 그럴꺼면 예술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지요. 현실이 곧 예술인 거니까요. (어라~ 근데 이말도 그럴 듯 하네요.) '모방'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술은 삶의 '재현 또는 재생산'이 아니라 일종의 '변형'입니다. 그림이나 음악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지는 못하니까요.

'변형'
대체 우리는 이 변형에서 무엇을 얻어 내길래 '예술'이라는 걸 하고, 감상하는 걸까요?
초초초 천재 아리스토텔레스 님은 '카타르시스:정화' 라고 합디다. (노인네, 참으로 명쾌합니다. )
전, 초초초 둔재라 '삐그덕'이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설명하자면, 그러니깐, 어떤것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술이란 녀석이 '어머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라는 감탄사가 나오도록, 제 사고의 '허'를 찌르는 거죠.
전형적인 틀이 깨지고, 균열이 생기고, 새로운 틈(공간)이 만들어집니다. '삐그덕' 한 만큼, 사유의 지평이 넓어지고, 느낌의 정도가 짙고 깊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예술에서 우리가 얻는 것이고, 예술이 지금껏 존재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습죠.

누드화를 보면서도, 이러한 보편적인 예술에 대한 시각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심장 박동을 즉각적이게 상승시켜 안면에 발그레한 홍조를 띠게하는 누드화.  사실, 더욱 사실적인 재현, 현실모습 그래로를 원한다면, 약간 위험이 있긴 하지만, 동네 목욕탕을 훔쳐 보는 것이 '벗은몸'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입수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그 행동을 통해, 제가 얻고자 하는 '삐그덕'이 벌어질까 의문 스럽습니다. 뭐 어떤식으로든 약간은 분명 생길 겁니다. 하지만, 결코 '그럴듯'하지는 않은 종류의 것이겠죠. ㅎㅎ

여하튼 누드화를 통해 얻는 '삐그덕'은 사람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찬미이던 폄훼이던)이 일차적이겠지만, '벗은 몸'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다가 '관능'을 불러옵니다. 적나라하게 벗은 몸이 이후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상상하며 흐흐흐... 우리는 음흉해 지죠. 그래서 우린 때론 누드화를 통해 '관능'을 일차적으로 얻기도 합니다.
 



2. 실레의 삶

실레는 28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은 생이지만 참으로 많은 이야기 꺼리를 만들었지요.
그의 아버지는 매독에 걸려 죽었는데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매독은 매우 흔한 병이었다고 합니다.) 실레의 눈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실레는 그의 어머니를 내내 무척 미워했데요. 그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실레의 애정이 아버지에게만 향해 있었다는 건 무척 의아한 일이죠. 전 전혀 반대일꺼라고 예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까요? 그과 그의 여동생과의 관계가 참 독특합니다. 그의 여동생은 그를 위해 누드화의 모델이 되어 주었고, 누드화 모델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고 해요. 제 생각엔 아마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성인 여성인 어머니에게서 느낀 실망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요? 소녀이고 어린 동생에게서 순수함과 관능을 동시에 느낀 것이죠. 실레에겐 그녀의 동생이 그림의 대상이 되고, 애정의 대상이 되었던것 같습니다.

실레는, (예술가의 삶이 의례 그렇듯?) 허세를 즐겼던 사람 같아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져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예술가는 모름지기 가난하고 약해야 한다며, 안그런데도 그런척 하며 살았데요. ㅋㅋ 뿐만아니라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이상과 현실을 철저하게 구분할 만큼 영악한 것 같기도 합니다. (글쎄, 수년간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던 여인을 차버리고, 귀족(중산층) 여인과 결혼한데요... 쳇)

'키스'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클림트는 실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후원했습니다. 둘은 이후에도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지요. 초반에 실레는 클림트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후에는 그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그림 세계를 창조합니다. 두리뭉실함이 아니라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법으로! 말이예요.

요약하면 그는,
 '관능'에 대한 집착 과
 속물적 기질을 보유하고 있으며, 허세를 즐겨 부린다 는 것 . 흐흐흐



3. 그의 작품을 보며 난 이렇게 '삐그덕'했다!


1) 절박함 : 절박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


포옹, 1917, 캔버스에 유채, 100 x 170.2cm

포개지기 직전의 남녀, 미친듯이 절박하게 서로의 몸을 탐하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 따위 아랑곳 하지 않고 두 인물은 타오르는 욕망에 충실하게 서로의 몸을 안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욕망 속에 너희도 끼어들어 봐' 라고 유혹하는 것 같아요. 모델이 있었다면 그들은 정말 서로의 몸을 간절하게 원하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리얼함의 극치. 이건 화가가 시켜서 취할 수 있는 포즈가 아닌거 같아요. 흐드러진 머리카락 드러난 체모, 꿈틀거리는 근육과 복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흰 시트.
아...저도, 그를 안고 싶습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없던 욕망도 불끈 불끈 생기게 하는. 절박함의 힘!



2) 도발 : 정면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저 눈빛, 내가 졌소!



헝크러진 머리, 오르가즘에서 막 헤어난 듯한 저 끈적끈적한 눈빛, 나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아... 떨려요.
동네에서 좀 놀면서 남자 여럿 울렸을 법한 자세와 눈빛, 하지만 그녀는 아직 앳된 '소녀' 입니다. 요부와 소녀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녀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관객 마음의 빗장을 두르립니다. 씩씩한 주먹질이 아닙니다. 발가락으로 살살살, 빙글빙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근두근' 합니다. 그녀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남정네가 있을까요? ㅋㅋ 

몰락한 제국, 거리의 화랑에 누드화가 넘쳐났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소녀의 등장은 그때도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야동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의 관객도 그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치지 못할 꺼 같으니까요.

검은머리의 소녀,
1911,
종이에 연필과 수채화,
56.2 x 36.7cm





다리벌린채 누워있는 누드,
구아슈와 연필,
47 x 30 cm



적나라 합니다. 보란 듯이 체모와 음부를 드러냅니다.
두리뭉실 야릇한 뉘앙스만 풍기는게 아니라, 그냥 밀어붙여서 다 드러냅니다.
아름다운 바디라인? 그런건 없습니다.
'이래도? 이래도?'
저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의 몸도 이렇잖아!' '너도 욕망 덩어리잖아!' '점잖은척 따윈 집어치워!' '옷을 벗고 거울앞에 서서 눈 똑바로 뜨고 너의 모습을 봐!' '그것을 두려워하지마!'
너무 적나라해서 불편합니다. 적당히 감추고 꾸며줘야 쉽게쉽게 편하게편하게 볼텐데... 마치 숨기고 있던 나의 알몸이 만인 앞에서 공개 된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3) 신경질, 불안 :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래서, 반했다!



그는 수천점의 드로잉 수백개의 회화를 남겼어요. 자화상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의 자화상들을 보면서 그는 분명 자신의 불안과 신경질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 기묘한 몸의 각도와 포즈 표정을 보세요. 편안함과는 수천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듯합니다. 지독한 자기연민.
자기 내면의 모습을 시각화 하기 위해 전전긍긍 끙끙거리며 애썼을 실레의 모습을 떠올리니, 아~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입니다. '욕망에 충실한 삶'과 '위선적인 사회적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불안해 하는 실레, 그리고 그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세포들. 거친 연필질.



 

4. 허무하게도...... 28살, 감기 걸려 죽다.


실레는 전쟁터에서,
임신했던 그의 아내를 독감으로 저세상으로 보내고, 얼마후 그도 감기에 걸려 죽습니다. 28살에!

내 나이 보다 조금 살다 갔네요.
제길. 비교가 무의미 하다는걸 잘 알고 있지만, 그의 삶의 모습이 왠지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의 삶의 모습,( 아아 이렇게 일반화 하는건 비겁한 모습.) 아니, 제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위인전 읽듯, 그의 생몰년도를 건조하게 지나칠 수가 없군요.

조심해야 겠습니다. 전쟁터를 휘돌던 독감에 걸려버리면, 죽음을 다이렉트로 맞이해야 하잖아요.
2008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삶에서, 독감 따위, 저에겐 스치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무리 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실레가 죽었을 때 유럽의 화단이 느낀 절망과 슬픔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삶을
다시한번 결심하다.


실레의 그림을 보면서 다시한번 다짐 합니다.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겠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어 울지 않고, 허황된 미래에 취해 허우적 거리지 않고, 현실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 가겠습니다. 욕망이 만들어내는 기형적인 형태를 낯설어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풍기는 관능을 즐기겠습니다. 무척,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런 삶이, 그런 삶이 담긴 그의 그림이!





  1. Commented by 파란영등포-이정미 at 2008.11.04 01:21

    에곤실레의 '멍'이란 작품을 보고 나서 관심있게 찾아본 기억~
    살짝 그때 기억을 다시 되살리는 이글...
    에곤실레는 "네멋대로 해라"같은 류의 삶이었을거 같아요~~

[미술관 & 츄리닝 입은 여자]는 미적 감각이라곤 옷 중에 딱 '츄리닝' 정도인 제가, 미술 작품들을 보고 든 느낌을 남눈치 안보고 대담하게 끄적이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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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도레 Gustave Dore (1832~ 1883) - 19세기 프랑스에서 최고로 잘나가던 일러스트레이터



2년전 인가, 어느덧 생일을 챙기기 민망한 나이가 되어, 선물을 받기가 무척 새삼스러워진 20대 후반의 생일날, 전 욕심을 부려 친구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친구는 흥쾌하게 yes라 이야기 했고, 책을 받아 든 날, 전 기쁨에겨워 그만, 작은 선술집에 친구와 마주 앉아 고갈비에 소주를 끝없이 퍼부어 마셨습니다. 다음날 쓰린 속을 부여 잡고 괴로워 했지만! 그 혼미한 와중에도 이 책을 품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신났더랬습니다. 흐흐흐.
그렇게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가 그려진 돈키호테가
저에게 왔습니다.

물론 다른 초호화 양장본 책들도 다수 소유하고 있습니다. 판형이 이것보다 더 크고 올 칼라로 번쩍이는 책들도 있어요. 그런데 왜 유독 이 책에 열광했느냐? 그 이유는 바로, 두말 할 것도 없이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을 접하게 된건 그렇게 오래전 일은 아닙니다. 나이 들어서도 동화, 우화, 민담 등에 환장해 있는 저는, 서점에서도 오래된 이야기 코너에 자주 머무는데, 거기서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가 들어간 샤를 페로 동화집(아마, 맞을 껍니다 )를 보고 완전 빠져들었습니다.

한컷 소개하죠.

빨간모자

아... 소녀의 눈빛 저 눈빛!

 

아아.. 이 긴장된 순간. 늑대와 소녀의 배치와 구도를 보세요. 적대적인 두 존재가 서로를 탐색하며 천천히 비켜 가고 있습니다. 결코 어느 한 놈이 섣불리 먼저 뛰어 들 수 없는 팽팽한 힘의 균형! 세포 하나하나가 털 하나하나가 쭈삣 서있는 듯한 긴강잠!


그러나 당시엔 주머니에 '돈'이가 없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죠.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내 다음에 꼭 도레의 삽화가 들어있는 그럴듯한 책을 사리라!' 주먹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고질적 깜빡거림에 의해 아련하게 잊혀졌다가 돈키호테 책이 나왔다는 광고메일을 보고 '아 그때 내가 그런 비장한 결심을 했었는데' 가 떠오르고......  다시 불타오른 겁니다.



삽화란 모름지기...
삽화가 단순하게 글 내용을 설명하는 보조적인 역할에만 머무르면 재미가 없습니다.
삽화는 책 안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다. 삽화가가 선택해서 묘사한 장면, 그것은 이제 무수히 많은 이야기 중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재현된 그것은 독자에게 즉각적으로 흡수 되고, 그들의 기억에 깊게 각인 됩니다. 순간 그 장면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이고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삽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주도한단 말입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거기다가, 끝내주는 삽화가의 작품은 글이 보여주지 못한 부분을 독자에게 보여 주기도 합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삽화가의 상상력이 더해지는 겁니다. 따블로다가 독자의 시야를 넓혀주는 거죠.
삽화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 속 또다른 새로운 세계!
 
도레의 삽화는 '경지에 다다른 이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가 창조해 낸 세계는 무척이나 매력적입니다.


도레 삽화의 특징 :  왜 열광하는가?

돈키호테 삽화

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의 모습



1) 극도의 섬세함

저 세밀한 선을 보세요. 약간 어지럽죠? 끈기를 가지고 계속 보다보면 눈에 익숙해 집니다. 그리고 찬찬히 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의 모습을 찾아보세요. 홀쭉한 몸매, 멍한 눈, 한손엔 책을 들고 칼을 하늘 높이 치켜 들고 있네요. 결투장이나 전쟁터가 아니라 서재에서요. ㅋㅋㅋ  단박에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 차릴 수 있을 것 같죠? 뿐만 아니에요. 섬세한 묘사 퍼레이드입니다. 세밀한 커튼의 결에서 큰 머리의 머리카락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결과 전환, 탁월! 쥐를 타고 결투하는 쪼끄만 기사들은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어요! 돈키호테 주변에서 왁자지껄 웅성거리는 것들은 그의 망상들이에요. 도레에 의해서 돈키호테의 망상들은 모양과 움직임을 가진 살아 있는 존재들로 묘사되었죠.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습니다.
아... 그의 디테일, 디테일 ,디테일! 당시의 유럽 사람들이 왜 그의 그림에 열광했는지 완전 이해가 갑니다.



2) 환상적인 분위기
얼핏 섬세한 묘사는 환상적인 분위기와 잘 매치되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그렇습니까? 섬세하게 묘사된 가운데 펼쳐지는 이 환상적인 장면을 보세요. 구도가. 감탄을 절로 자아 내는 군요.



이 그림이 어떤 이야기 속의 한장면 인지 알지 못해도 상관 없습니다. 그림 자체가 주는 감흥에 푹 빠져 들어 보아요. 강을 따라 흘러 가고 있는 여인의 주검, 아마도 저기 멀리 보이는 성스러운 성으로 가려는 거겠지요. 여인의 얼굴의 빛나는 걸 보니 아마도 그녀는 고귀한 신분이었나 봅니다. 성 위에도 상서로운 빛이 감돌고 있어요. 천사라도 내려올 것 같습니다. 강물은 잔잔합니다. 그 위를 노저어 가고 있는 사공과 그녀! 아... 소리와 냄새가 그리고 공기의 기운이 느껴질 것만 같습니다. 분명 저 곳엔 안개가 끼어 있었을 꺼에요.


 
3) 독창적인 해석
삽화를 단지 글 내용의 설명 용도로만 제한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삽화가 자신의 생각을 반영시켜 새로운 해석을 덧붙야 신나지요. 돈키호테를 묘사한 도레의 삽화엔 돈키호테에 대한 반짝이는 그의 해석이 담겨 있습니다. 도레는 돈키호테의 코믹한 캐릭터를 극대화 시켰어요. 딱딱하고 굳어 있는 표정과 동작이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동작묘사로 그의 코믹성을 더욱 키워주고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줬답니다.
(단테의 신곡에 그린 삽화에도 그의 반짝거리는 해석이 담겨있다고 합니다만, 성경에 들어간 삽화도 무척 독특하고 아름답다지만, 아쉽게도 전 못 봤네요. 하하하)



역시 그도, 천재였다... 작품에서 빛이 난다.

도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유명한 책의 삽화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조기에 표출했다고 해요. 전형적인 천재인거죠.......(분명 노력을 했을꺼야.. 그랬을 꺼야.. 태어나면서 재능을 가졌을리가 없어.. 암암 물론이지..아아아아~~ 천재라는 거대한 벽!) 열댓살 꼬마 녀석이 당시 최고의 원고료를 받아 챙겼다니까요. 그림 좀 사 모으고 방귀 좀 뀐다 하는 사람들이 다 그의 그림을 방에 걸어두고 싶어 했데요. 
고흐도 도레를 좋아라 헀고, 피카소도 도레에게 뿅갔다고 하니,
내가 '그는 대단해'라 떠들지 않아도, 이미 그는 경지에 오른 존재!
작품에서 빛이 나는 건 당연지사!?!
(약간. 허탈해 지는 이유는 왜일까요......  신은...... 공평하지 않아요)

마무리 즈음..... 퍼뜩!
도레가 만약, 삼국지의 삽화를 그렸다면 어땟을까요?
소설 태백산맥의 삽화라면? 아마 더욱 비장미가 살아나고, 디테일하고 사실적인 묘사 속에서도, 뭐랄까... 이상향의 세계를 쫘악~ 펼쳐 놓겠죠?

빛이 나는 작품을 볼 때마다,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면, 내 눈앞에서 숨쉬며 작품을 만드는 그 또느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과학기술이 저의 바램을 실현 시켜 줄 수 있을까요? 저 죽기 전에?
  


  1. Commented by 어벙씨 at 2008.10.29 18:16

    모르는 화가의 이름을 알게 될 때마다 뿌듯해서 애독자가 되었습니다. 좀 더 자주 써주시면 안되요? @@

    • Commented by 차완무시 at 2008.10.29 19:16 신고

      능력이 부족하야 지금보다 더 자주는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은 꼭꼭 올릴께요. 애독자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임감 두둥!


[미술관 & 츄리닝 입은 여자]는 미적 감각이라곤 옷 중에 딱 '츄리닝' 정도인 제가, 미술 작품들을 보고 든 느낌을 남눈치 안보고 대담하게 끄적이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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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헤링 Keith haring (1958-1990) -80년대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낙서화 화가 


지난 봄 여의도역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역 전체 벽에 되어 있던 랩핑광고. 실로 엄청난 시각적 자극이었습니다. 벚꽃사진으로 벽 전체를 도배했었는데, 엄청난 규모에도 압도, 생생한 프린트 상태에 놀람!
광고가 무섭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벽화가 가지는 공공의 효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순간 퍼뜩 떠오름'에서 그치고 말았죠. 생각을 더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몇주전에 20세기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 다녀왔어요. 멕시코 혁명 시기 벽화운동을 주도했던 디에고리베라, 오로스코 등 거장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멕시코 사회에 대한 사실적인 때로는 상징적인 묘사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벽화 운동을 벌였는가?' 가 궁금해 졌습니다. 벽화가 머금고 있는 대단히 큰 영향력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리고, 키스 헤링. 지하철역이나 담벼락에 그렸다는 그의 낙서그림 (Graffiti)


사진 : 키스헤링 재단 http://www.haring.com


벽에 그려진 그림이, 그린 목적 그리고 무엇을 그렸냐에 따라 완전하게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그리고 벽화가 가지는 매력에 환호했습니다. )


짝꿍이다 싶은 것을 연결해 보아요~

A 상품을 알리고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는 광고. 
B 혁명이라는 목적의 실현도구로서 왠지 크고 무겁고 비장한 느낌의 그림. 
C 넘치는 재치와 유머로 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키스헤링의 낙서화. 


1 둥둥 떠다니는 돈다발
2 한사람이 손 끝으로 가리킨 한 방향을 거대한 집단이 한맘한뜻 으로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 
3 놀이 동산을 뛰어다니는 절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이들 무리



구체적인 묘사 대상이 없이 선과 면과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보면, 참으로 난감해 집니다. 대체, 작가는 뭘 말하고 싶은 거야? 해석이 참으로 어렵죠. 현실의 묘사와 대상의 재현을 포기하고 지극히 관념화 된 그림이 과연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과 교감할 수 있을까요? 키스헤링도 아마, 이런 질문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예상합니다. 그래서, 관객들과 소통하지도 못하면서 예술가임네 하며 소위 잘난 체하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지하철역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앞에서 '함께' 그림을 그린 것이죠. 


사진 : 키스헤링 재단 http://www.haring.com



키스 헤링은 팝아트 장르의 화가로 분류되죠. 하지만 대표적인 낙서화가인 바스키아와 키스헤링은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절망과 분憤 섞인 냉소가 느껴 진다면, 키스헤링은 여유롭고 유머러스합니다. 무질서보다는 질서가 느껴지고 즉흥적이라기 보다는 철저하게 디자인된 느낌이 나지요. 그가 인종차별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도, 동성애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도,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을 그려도 그 작품들이 무겁거나 심각하거나 엄숙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들을 덜 불편하게 하지요. 그 역시 성소수자였고, 에이즈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그의 그림에는 유머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무척 마음에 듭니다. 



저 자유자재로 꺾여 있는  관절들을 보세요. 단순화된 인체들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지요? 저런 모양의 쿠키가 나오면 완전 귀여워서 절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요~!!

키스헤링은 이렇게 귀여운 아이콘을 이용해서 당시 미국사회의 대중문화와 사회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난 즐거운 '놀이' 였죠. 당시의 그래피티는 시대의 욕망을 분출하는 일종의 코드로 기능했던 것 같습니다. 70~80년대 뉴욕거리의 낙서란 경제적으로 힘들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던 유색인종 아이들이, 질풍노도의 그 시기에! 공공장소의 벽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일종의 일탈행위였으니까요. 키스헤링은 백인이었고, 십대도 아니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낙서랑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죠. 아마도 그는 낙서를, 십대의 아이들처럼,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분출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절제된 감정을 표현하여 대중과 소통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여긴 것 같아요. 새로운 미술적 표현 수단으로 '미술관 전시'가 아니라 낙서라는 방식을 이용한 것이죠. 분명 미술의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한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작품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고 머그잔과 티셔츠의 문양으로 쓰이게 된 계기는, 그의 낙서들이 지하철 벽이 아니라 '미술관과 갤러리'로 기어들어가 전시 되었기 때문이죠. 쩝! (물론 키스헤링은 유명해진 후에 틀에 박힌 대중과의 소통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팝 샵 Pop Shop'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는 결코 어렵지않은 '미술관밖 미술'이라고나 할까요?)

혹자는 키스헤링의 아이콘들이 상품화되어 대량으로 거리에서 유통되는 것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보기도 합니다. 전 오히려 질문하고 싶습니다. 왜 그러면 안되죠? 예술작품은 특정한 장소에서만 대중과 만나야 합니까? 
물론, 작품속 일부 이미지나 아이콘만 차용되 아무런 메세지 없이 배열/배치 되어 있는 상품이 과연 예술 작품인가라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의 그림이 그려진 머그잔을 사용하고 티셔츠를 입으며 거창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아니잖아요! 뿌우~~


여하튼 저는 그가 어렵지 않게 대중과 소통하려고 했던 그 시도들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여유로움과 유머러스함이 참 부러워요. 
제가 사는 동네의 담벼락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회색 시멘트가 발라진 삭막한 벽에 키스헤링의 그림같은 유머러스한 낙서화로 가득차 있으면, 그 앞을 걸어다니면서 흐뭇하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웨스트 빌리지 Tony Dapolito 레크레이션 센터의 수영장에 그려진 키스 헤링의 벽화 -


(나중에 기회가 되면, 벽화-공공미술에 대해서 좀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 Commented by 어벙씨 at 2008.10.18 12:24

    좋은 글 잘 읽었삼. 이런 컨셉 진짜 좋은 것 같다.

  2. Commented by 굿럭쿄야 at 2009.05.03 00:36 신고

    키스 헤링 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