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2.19 보살예수 향기에 흠뻑 취하다. (14)
  2. 2009.02.06 행복하고 싶다 (2)

보살예수 향기에 흠뻑 취하다.

鑑賞 2009.02.19 15:15 posted by 차완무시

1. 기독교에 대한 나의 고백

기독교 모태신앙  => 초중고교시절 : 열정 넘치고 성실한 믿음 생활  => 20살의 삐딱선 : 회의와 부정  => 그후로 부터 쭉 : 이도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상태

뻔한 흐름입니다. 저 역시 저길을 밟고 있습니다.
나름 저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던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회의와 부정은 '나에게 필요한 하느님'과 '기독교에서 해석하는 하느님'간의 간극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도저히 그 누구의 설명으로도 매꿀 수 없었기에 등을 돌려 버릴 수 밖에 없었지요. 패거리, 기복, 축재, 제국주의적 선교관, 현실사회문제에 등돌리기 등  한국의 기독교가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부분은 논외로 치더라도, 한국 기독교의 '하느님' 또는 '예수' '진리' '천국' '복음' 등, 존재의 이유가 되는 교리에 대한 불친절하고 불성실하고 주먹구구에다가 또 불분명한 해석은 저로 하여금 20년 기성의 종교생활을 미련없이 접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구원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국의 기독교에서 이걸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절대적 존재이자 사랑과 은총 그 자체인 '하느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는 일이란게 겨우,
"나 말고 다른 신을 믿으면 넌 죽어! " "구원은 기독교에만 있다구, 구원 받지 못하면 넌 지옥가! "
이딴 유치한 협박이라니요. 그럼, 사회 지리 문화적 차이로 예수를 믿지 않는, 또는 아에 그리스도교를 접해 본 적도 없는 수천만, 아니 수억이 넘는 인간 존재들은 얄짤없이 지옥불로 떨어져야 한다는 겁니까?
에이 뭐가 이래요? 사랑과 구원과 은총의 신이라면서, 이건 사람을 살리려는게 아니라 죽이려고 작정한거지요.
지들만 옳다는, 지들만 유일한 선이라는, 지들만이 진리라는 저 지독한 에고는 분명 신의 마음은 아닐 껍니다.
해방과 궁극의 행복, 새로운 세상의 상징이었던 '신'인 하느님은 이렇게, 권력 가진 인간들의 음모로 인해 그들의 구미에 맞게 덕지덕지 덧칠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는 기이한 오물을 뒤집어쓴 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아이고 주여' '아이고 주여' 하고 있지요.

대상이 모호한 실망과 부정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전체에 대한 실망,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실망, 성직자에 대한 실망, 사람에 대한 실망, 그리고 신에 대한 실망, 나아가 나에 대한 부정.


2.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 : 인정할 수 있어?

 


  보살 예수 라는 책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소위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버리기 입니다.

  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다녔던 교회 주일학교 주보에 실려있던 한 삽화를.
  산정상에 이르는 여러 개의 길이 있는데, 연결되는 길은 예수가 이끄는 한 길뿐이고.
  다른 길은 끊어져 있거나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겁니다.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는 이단이다' 라고 선명하게 써 있었어요.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반추하고,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고, 실천하고, 삶의 이치를 찾고 깨닫고, 함께 살 길을 모색하고 그 속에서 궁극의 행복을 느끼고, 이런 것들을 '종교'라 말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모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삶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니 꼭 기독교가 아니라도 진리를 향해가는 모든 사람의 노력은 구원을 향하는 것이고,
그러니 예수도 보살도 다 하느님이라는 진리로 향하는 안내자이고 매개자가 된다는 것이죠.

어떤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과 평화와 은총의 '하나님'과 더 닮아 있는 것 같습니까?
이단이라 규정하고 정죄하고 배척하고 심판하는 모습입니까?
이해하고 수용하고 접목하고 함께 하는 모습입니까?

현실 속 내가,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기로 결심 한 것은 무척 오래된 일입니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고 상대성을 수용하는 것이지요. 공(空)과 허(虛)와 무(無) 개념을 가장 '선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시도에 눈길이 갑니다. (이건 참...)
제가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진지한 고민과 사색의 결과물이 나오면 시선을 두게 됩니다.
내가 내린 결론도 진리가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일테지만...
음...몸에 배어버린 습관인 걸까요?


3.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습관. 교회는 저에게 습관입니다.
식구들과 함께 어릴때 부터 다니던 교회를 뛰쳐나와 한동안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가,  20대 후반 다시 가게된 교회는  성문밖 교회 라는 곳입니다.  이 교회는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도, 그리고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도 참으로 제 마음에 쏙 드는,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삐딱선을 타는 나에게 내려진 일종의 '은총'인 셈이지요.

그런데 요즘, 거진 반개월 동안 저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음 거창하게 말하면 '한국의 기독교' 라는 것이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지만, 최근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 겁니다. 교회가 붙잡고 있는 '유대의 하느님', '유럽의 하느님'은 더이상 제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도, 그렇습니다.
한때,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가난한 이들을 향한, 소외 받는 이들을 향한 그 광폭하고 끝이 없는 사랑에 감동했던적이 있었습니다. (쉽고 간단한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예수의 시선에 탐복해 무릇 '사람과 소통하는 글(말)은 쉽고 재미나야한다' 라는 원칙을 세우고 지키고 있을 정도지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예수는 시공을 뛰어넘어 한국에 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봤는데, 답이 안나오는 겁니다. 저에게 예수는 그가 숨쉬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존재합니다. 실체성을 거세한다면 저에게 예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거짓말을 하기 싫었습니다. 교회에서 (성문밖에서도 물론!) 의례적으로 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말하기 곤란했습니다. 그러니 도망을 다닐 수 밖에 없더라구요.


4. 내가 불자였으면? 

보살예수의 관점을 제가 만약 15년 전 쯤 알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저는, 성직자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를 신앙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정말 재미있는 날나리 불자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처럼 도망을 가진 않았을것 같아요.

저자가 말하는 '종교의 특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 진리 앞에서 겸손한 신앙, 교리와 사상보다는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구원하는 힘임을 깨닫는 지혜' 를 한국 기독교가 깊이 있게 수용할 수 있을까요? 아직 멀~은거 같습니다.
하나님께 '서울'을 봉헌하고, 지도에서 사찰을 지워버리고, 특정 교회 인맥으로 공직을 채워 버리는 이가 승승장구 하는데요 뭐.

(아... 책에 대한 감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또 신세한탄 또는 회상이 되어버렸네요. 후다닥 끝 냅니다.)


행복하고 싶다

雜想 2009.02.06 19:02 posted by 차완무시

친구와 메신져를 하다가 튀어나온
'삶의 방향'이라는 말에 난 급 당황했다.
방향성. 좌우. 진보. 더 나은 삶.
이것과 유사한 단어나 개념을 일부러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었다.
누군가 나를 네모난 틀에 가두기 위해 보낸 감시병들 같아서 랄까?
뭐 그렇다 하더라도, 늘상 지면을 장식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눈에는 익어야 하는데
오늘 대화창에 뜨는 그 단어들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나도 고민한 적은 있다.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안해봤을리가 없잖은가!
어딘가에 분명 나있을꺼라고 기대했던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을 찾으며,
대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지새운 밤이, 마신 술이, 읽은 책이, 나눈 이야기가 얼마던가!

나름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시시하게도,
'진리'라는 것을 '믿지'않기였다.
좌우의 구분도, 어떤 방향도,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어떤 하나에 절대성을 부여해 맹목하게 되면,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을 볼 줄 모르게 된다. 그것 때문에 상처 받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결국 미치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열정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개코나 열정이라니.

초기.
영원을 부정하고, 절대선을 부정하고, 상대를 수용하니, 어지러웠다.
기준. 없으면 불안한 그 것. 하지만 난 과감해 지기로 했다. 선을 비틀어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21세기형 에피쿠로스가 되기로 결심했다.

난 행복하고 싶다. 그래,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
다른 사람은 다 불행한데 나만 행복해 질리가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고로, 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꾼다.
내가 맺고 있는 얇고 가느다란 관계들도,
사회도 권력도, 먹고 자고 똥 싸는 것도, 다 그것을 향한다.

행복하게 산다는건 뭘까? 1000인이 있다면, 1000개의 행복이 존재할 꺼다.
남보다 더 가진다고 해서, 1등 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지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고, 내껄 나누면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난, 소박한 행복을 꿈꾼다.
욕심을 부려서 남보다 많이 가지는 것,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거는 싫다.
남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가지는 것을 행복이라 믿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지면, 세상 참 살기 힘들어 진다. 오늘 한국을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그걸 행복이라 믿게 만들어 버리는 모든 것들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혁명도 하는거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
단순하고도 근본적인 대답.
그리고 나면,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만들어지겠지?